[푸드스캐너=송나리]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등줄기로 땀이 흐르는 8월, 온 지역이 거대한 찜통이 된다. 이 시기가 되면 몸속 수분과 함께 입맛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다. "오늘 점심 뭐 먹지?"라는 질문에 선뜻 답이 나오지 않을 때, 구원투수처럼 등장하는 반찬이 있다. 쪼글쪼글한 외모와 아삭한 식감이 특징인 오이지다.
찬물에 밥을 슥슥 말아 오이지 한 점을 올려 먹는 순간, 달아났던 입맛이 거짓말처럼 되돌아온다. 간장게장이 사계절 내내 활약하는 밥도둑이라면, 오이지는 여름 한정으로 활동하는 ‘계절직 밥도둑’이다. 그만큼 오이지는 오래전부터 여름 식탁을 대표하는 반찬으로 사랑받아 왔다.
그런데 우리가 오이지를 너무 당연하게 먹고 있던 것은 아닐까? 오이지를 즐겨 먹지만, 우리 몸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드물다. 그렇다면 오이지는 과연 건강식일까, 아니면 그저 짠 반찬일 뿐일까.
여름이면 오이를 찾는 이유

오이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주인공인 오이부터 살펴봐야 한다. 흔히 '천연 이온음료'에 비유되는 오이는 수분 함량이 약 95%에 달한다. 한입 베어 물기만 해도 갈증이 시원하게 가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원한 맛만큼 영양 성분도 제법 알차다. 오이는 100g당 약 13 kcal로 열량 부담이 적은 반면, 칼륨은 약 160mg 함유돼 있어 체내 나트륨 배출을 돕는다. 항산화 성분인 베타카로틴을 함유하고 있으며, 뼈 건강에 중요한 비타민K도 풍부해 오이 한 개만 먹어도 성인 하루 권장 섭취량의 약 20%를 채울 수 있다. 이쯤 되면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오이를 찾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제철 오이를 오래 즐기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수분이 많은 오이를 오래 보관하기가 쉽지 않았다. 며칠만 지나도 금세 물러지기 일쑤였고, 제철마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오이를 모두 소비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오이를 바꾸는 시간, 발효

여기서 조상들이 꺼내 든 치트키가 바로 ‘소금’이다. 오이를 소금물에 절이자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저장 기간이 길어졌고, 특유의 꼬들한 식감과 짭조름한 풍미까지 덤으로 얻었다. 그리고 이 과정의 숨은 주인공이 바로 ‘발효’다.
많은 이들이 ‘발효’를 단순히 음식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 정도로 생각하지만, 식품과학에서는 미생물이 식품의 맛과 향, 그리고 영양 성분에 영향을 주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실제로 오이가 숙성되는 동안 수용성인 비타민C는 일부 줄어들지만, 단백질은 몸에 흡수되기 쉬운 유리아미노산 형태로 잘게 쪼개진다. 오이지 특유의 깊은 감칠맛 역시 이 아미노산 덕분이다.
새로운 생리활성물질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미국 농무부 농업연구청(USDA ARS)과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NCSU) 연구진은 발효 오이에서 GABA(감마아미노부티르산)가 자연적으로 생성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GABA는 혈압 조절과 신경 안정, 면역 기능 등과 관련해 연구되고 있는 대표적인 생리활성물질이다.
발효채소가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 인체 연구도 있다. 미국 노스 플로리다 대학교 연구팀에 따르면, 6주 동안 하루 100g의 발효채소를 섭취한 참가자들의 장내 미생물 구성에서 유익한 변화가 나타났다.
다만 이러한 결과를 오이지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염도와 숙성 조건에 따라 성분과 효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이지는 단순한 채소 절임이 아니라, 발효를 거치며 영양 구성이 달라지는 식품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오이지가 되면 생기는 변화

가장 큰 변화는 수분이다. 생오이를 절이는 과정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쪼글쪼글한 외형이 만들어진다. 수분이 줄어든 만큼 일부 영양 성분은 상대적으로 농축돼 높아지고, 일부는 감소한다.
오이지의 식이섬유 함량은 생오이보다 약 2배 높다. 뼈 건강에 도움을 주는 칼슘 역시 100g당 18mg에서 42mg으로 약 2.3배 증가한다. 반면 칼륨은 오히려 196mg에서 55mg으로 크게 감소하며, 비타민C와 엽산, 베타카로틴 등도 줄어든다.
밥도둑이 남긴 발자국, 나트륨

밥도둑이 입맛을 훔쳐 간 자리에는 나트륨이라는 묵직한 대가도 남는다. 농촌진흥청의 국가표준식품성분표을 살펴보면 생오이의 나트륨 함량은 100g당 3mg에 불과하지만, 오이지는 1,647mg으로 약 550배 늘어난다. 절이는 과정에서 오이에 소금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권고하는 성인의 하루 나트륨 섭취량은 2,000mg 미만으로, 오이지 100g만 먹어도 하루 권고량의 80%를 단숨에 채우게 된다.
물론 오이지를 한 번에 100g씩 먹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반찬으로 곁들여 먹는다. 하지만 식탁 위에는 오이지 말고도 김치와 국물요리라는 ‘나트륨 공범’이 늘 대기 중이기에 안심하긴 이르다. 이들이 한데 모이는 순간, 한 끼 식사는 금세 나트륨 과포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오이지가 식도암 위험을 높인다?

영국암저널(British Journal of Cancer)에 게재된 메타분석에서는 피클∙오이지와 같은 절임채소를 많이 섭취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식도암 위험이 약 2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연구에서 지목한 위험군은 절임채소를 오랜 기간 많은 양을 꾸준히 섭취하는 식습관을 의미한다. 즉, 특정 음식 하나보다 고염 식습관을 비롯한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밥도둑'을 다루는 우리의 자세

오이지를 먹기 전 물에 가볍게 헹구거나 10~15분 정도 담가두면 나트륨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다. 다만 욕심은 금물이다. 너무 오래 담가두면 나트륨과 함께 오이지 특유의 풍미까지 옅어질 수 있다.
식탁의 균형도 중요하다. 오이지를 먹는 날에는 국물 요리나 다른 나트륨이 많은 반찬을 조금 줄이고, 칼륨이 풍부한 채소와 과일을 함께 곁들이는 것이 좋다.
올여름에도 오이지는 여전히 우리의 밥을 훔쳐 갈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매력적인 '계절직 밥도둑'을 식탁에서 내쫓는 일이 아니라, 장단점을 제대로 알고 영리하게 즐기는 일이다.

